나는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를 참 좋아한다.
시인님은 시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집에 지나지 않지만,
비로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하신다.
그리고 본인도 누군가가 본인의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으며, 그렇게 된다면 본인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그에게 가서 꽃이 되고 싶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서로에게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되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시간에 알겠되었지만, 그 때는 나에게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청소년들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 시가 나에게 더 와닿았다.
김춘수 님의 "꽃"이란 시의 내용을 좀 빌리자면, 내가 이 "꽃"이란 시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시가 비로소 나에게 와서 꽃이 된 것이다.
아무튼, 청소년들을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나는 청소년들의 이름을 자주 부를 기회가 있었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해줄 때마다 굉장히 기뻐하고 좋아했다. 어떤 아이는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며 약간 놀라기까지도 했다. 한편, 어떤 청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을 못불러줄 때, 굉장히 서운해하기도 했다.
사회에서 대부분의 성인(부모님, 교사 등)들은 청소년들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다(어쩌면 잘 기억하거나 외우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지도 모를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거나, 더 심한 경우는 "야"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여전히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반증일 것이다. 사실 어른들의 경우, 소통을 할 때, 이름을 모른다면, 상대방의 직책이라든지 내지는 선생님.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왜 청소년들에게만은 그런 호칭에 인색한 것일까?
뭐 어쩌면 청소년들의 역할이 많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집에서는 부모님의 아들, 딸이겠고, 학교나 학원에서는 학생이며, 학교 밖에 있는 청소년은 그냥 학교 밖 청소년인 것 같다.
아니, 그래서 더 청소년의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청소년들은 꽃이기 때문에 이름을 불러줘야 하며, 특별한 호칭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 역사적 사건에 명명을 하는 참 중요하다.
아래의 글은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받은 정치외교학 교수님의 기고글이다. 이 글에서는 명명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이 명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해봤다.
우리는 ‘3.1절’이나 ‘4.19혁명’ 또는 ‘5.16쿠데타’처럼 무슨 기념일을 포함해 사건의 명칭을 붙이기 좋아하는데, 이러면 역사적 사건의 성격을 잘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6.25전쟁의 네 주체는 남북한 그리고 미국과 중국입니다.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합니다. 미제국주의 아래서 신음하는 남조선을 해방시켜 통일하기 위한 전쟁이란 뜻이죠. 미국은 ‘한국전쟁 (The Korean War)’이라고 합니다. 장소를 중시해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란 말이죠. 중국은 ‘항미원조전쟁 (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에 대항해 조선 (북한)을 도운 전쟁이라는 거죠. 그런데 남한은 ‘6.25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시작된 날짜를 강조하는 거죠. 북괴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강행함으로써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6월 25일을 세뇌시켜왔는데, 바로 이 때문에 원한과 증오 그리고 적대감이 증폭되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 가운데 부부싸움을 하거나 형제자매들이 싸우면 ‘왜’ 싸우는지가 궁금하지 ‘누가 먼저’ 때렸는지가 궁금하세요?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생각하면서 앞으로 이러한 불행한 일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게 바람직하지, ‘누가’ ‘언제’ 싸움을 시작했는지 세뇌시키며 ‘쳐부수자 공산당’과 ‘상기하자 6.25’를 부르짖는 게 더 중요하냐는 뜻입니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2015 ->광복 70년에 생각해보는 분단과 통일: 분단은 왜 되었고, 통일은 어떻게 이룰까?<기고> 글에서 발췌"
청소년들의 이름을 불러줄때, 우리는 그 청소년의 이름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인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은 함부로 짓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부보님이, 가족들이, 혹은 작명가가 그 사람에게 맞을법한, 혹은 그렇게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뜻을 가진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닌가?
내 아들만 해도 그렇다. 큰 아이의 이름은 주영이고, 작은 아이는 주원이다.
주영의 한자 뜻은 주인 주, 영화로울 영 이다. (주영이가 세상에서 주인처럼 영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뜻은 주님(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주원이의 한자 뜻은 주인 주, 으뜸 원 이다.(주원이가 이 세상에서 주인처럼 으뜸이 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뜻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는 귀한 뜻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제 좀 우리 청소년들에게 이름을 불러주자. 그리고 그 이름의 뜻도 물어보자.
귀한 뜻은 생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그 이름을 불러주며, 그 청소년을 계속 생각해보자.
그랬을 때, 비로소 그 청소년은 우리 청소년지도자에게 하나의 꽃으로 더 다가올 것이며,
그 청소년 역시 청소년지도자가 자신에게 꽃으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