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그랑"
아내는 자기 발밑까지 날아온 사기 그릇 조각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눈이 둥그레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일단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주방 주변에 널부러진 깨진 조각들을 하나씩 쓸어 담았다. 일요일 아침 8시부터 내가 일을 낸 것이다.
교회 예배를 마친 후 오랜만에 보령에 계신 장모님을 찾아뵙고, 처남네 집에 태어난 예쁜 딸을 보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큰 아이 주영이와 둘째 주원이는 군산 집에 남기로 했고, 이들이 점심식사로 먹을 김밥을 준비하던 터였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계란 4개를 국그릇에 풀고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비몽사몽에 힘 조절이 잘 안되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릇이 바닥에 내팽겨져 버렸던 것이다.
나는 징크스가 있다. 아침에 면도 하다가 칼날에 베어 피를 본다든지, 밥을 먹다가 음식물을 흘린다든지,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하루 종일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매번 그렇지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생각을 안 좋은 방향으로만 하니까 더 그렇게 느껴졌던 거다.
우리는 종종 "꼭 내가 세차하는 날에만 비가 온다니까!"라는 말을 한다. 세차하지 않은 날에 비가 온 적도 많았고, 세차한 날에 비가 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내가 믿고 싶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일종의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심리의 오류상태가 있다.
예배 후 나름 장거리 운전을 해야 했고, 그 전에 아파트 청약 예비입주자 동·호 추첨 참가신청을 위해 견본주택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던 날이었다. 아침에 벌어진 한 바탕 소란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자기야. 아마 오늘 내가 일진이 좋지 않고 운도 별로일거 같아. 하지만 당신이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해"
"맞아. 그러니까 자기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어서 하던 일 해"
김밥도 맛있게 준비했고, 예정대로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견본 주택으로 향했다. 그 날 따라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차가 이리저리 흔들렸고, 몇 차례나 위험하게 우리 앞을 끼어드는 차량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아내에게 "자기야. 이거 봐. 내가 이렇다니까! 오늘 운이 안 좋아 그치?"라고 했다. 아내도 웃으면서 "그러게, 이상하게 그러네"라며 맞받아쳤다.
코로나19로 인해 예약제로 운영되는 참가신청이어서인지 견본주택 주변은 썰렁했다. 가드와 안내원들만이 자기 자리를 정확하게 지키며 안내를 하고 있었다. 순서에 따라 열 체크와 소독 및 방역 수칙을 다 지키고 실내로 들어섰다. 아내와 나는 생애 첫 아파트 구매를 위한 길이 이렇게 어렵고 험난하냐면서 서로를 보고 웃었다. 예비37번. 며칠 전 문자로 받은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여 참여가 몰렸다는 소문을 듣고 저 정도의 번호면 당연히 떨어질 거라, 이번 기회가 나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오늘 아침 나에게 벌어졌던 일은 그에 대한 증거(?) 라고 장난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 직원에게 참가 신청 절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25개의 동·호가 남아 있는데, 종종 서류 부적격 등의 이유로 순서가 계속 밀릴 수 있으니 참가신청을 하겠냐는 질문에 아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약 3초간 바라봤다. 아내는 되든지 안 되든지 여기까지 왔으니 신청을 하자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 내 앞으로 11명의 사람이나 있으니 나에게까지 기회가 오겠냐는 생각에 마음이 더 편했다. 무엇보다 오늘 아침 내가 벌인 그 크나큰 일 때문에라도 나에게 행운 오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깨진 그릇이 아내의 발 바로 앞에서 멈춘 건 가장 큰 감사할 일이었고, 다행이었다. 사실 나의 징크스는 이러했다. 대체로 아침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하루 종일 일이 꼬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또 다른 감사가 있었고, 결국에는 다시 일이 풀려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징크스라기보다는 그냥 삶의 과정이고 부분이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공존하는 그런 삶의 연속선상.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에 어디에 의미 부여를 하느냐가 더욱 중요했다. 참가 신청 후 장모님을 만나 담소도 나누고, 예쁜 신생아를 보며 한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군산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그렇게 내 운수 나쁜(?) 날이 잘 지나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월요일이었다. 청소년 활동가로 현장에서 활동 하는 나의 근무 패턴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을 하고, 일요일과 월요일은 쉬는 날이다. 하지만 보통 나는 월요일에 후원자님, 위원님, 지역의 이웃 등을 만난다. 3월29일 오전에도 내내 <마을에서 뭐하니?>라는 청소년 진로 책을 구매하신 분들을 찾아뵙고 책을 전달하며 감사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11시50분쯤이었다. OOOO-OOOO의 낯익은 번호가 내 스마트폰 창에 떴다.
"안녕하세요. 여기 OO아파트 인데요. 축하드립니다. OOO동 OOOO호에 당첨되셨으니까요. 내일까지 계약금, 서류, 도장 챙겨서 견본주택으로 오세요. 몇 시쯤 오실 수 있으세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꿈인가 싶었고 기분이 약간 멍했다. 하지만 내 볼을 꼬집어보거나 하는 그런 유치한 일은 하지 않았다. 점심 쯤 약속 시간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하며, 우리는 3월21일 벌어졌던 우리의 해프닝과 그날 하루 나누었던 이야기를 되새기며 다시 한번 한바탕 웃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주택을 구매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인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파트 청약 당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아마도 새 아파트에 대한 기대감, 가격 상승에 대한 시장의 시세 등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언론 등에 보도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현재의 상황이 당연히 좋다. 하지만 나의 앞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나는 A형이고, 소심하며, 빚을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항상 나의 현재에 맞추어서 생활했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니멀(Minimal) 라이프를 꿈꾸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나의 마음은 신규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종종 나의 지인들은 "예전에는 그냥 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좋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되니까 마음이 또 달라지죠?"라며 웃으며 말한다. 그 말도 맞다.
이번 일들을 겪으며 나는 새삼 내 옆에 있는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았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든지, 어느 날의 운수가 좋든지 나쁘든지 현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것, 그리고 일상에서 감사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일요일 아침 김밥 싸는 것을 준비하며 자칫 크게 다쳤을 수도 있을 아내가 그렇지 않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할 수 있음을 아는 행복이 내 인생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말이다.
태그:#일상에서의 감사, #사랑하는 가족, #운과 징크스, #아파트 청약 당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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