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블로그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중학교 3학년 여자 청소년과 대화를 하면서 우연히 필자의 나이를 말하게 되었다. 참고로 필자의 나이는 36세이다. 나이를 듣자마자 그 청소년은 “선생님 40대 아니었어요?”라며 놀라서 소리친다.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의연했다. 종종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필자는 종종 그런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 날 청소년 자치교육을 하기 위해 어느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그 초등학교에 재직하는 어느 선생님께서는 필자를 보면서 “와~ 엄청 동안이시네요. 학생인줄 알았어요”라고 말하셨다. 필자는 기분이 좋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의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런가요? 저는 노안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요”라고 했다.
특별한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사건을 통해 필자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모두 자기 관점, 자기 기준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준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완벽한 기준은 없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인권이라는 것도 두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가 다르면 인권의 상충이나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데, 두 당사자 모두에게는 각자의 생각과 관점이 있으며, 완벽하게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 있다. 평화적이고 수평적인 소통과정을 통해 합의를 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종종 청소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요즘 청소년들은 문제가 있다고도 말한다. 이것은 혹시 기성세대가 기성세대의 눈과 관점으로만 청소년들을 바라봐서 그런 것은 아닐까?
만약 기성세대들이 청소년들의 관점과 청소년들의 눈으로 청소년을 바라본다면 진짜 소통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느 책에서 배려라는 것은 상대방의 위치(입장)에 서서 생각해보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본적이 있다. 나는 이 배려가 상대방의 관점과 상대방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 가장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나의 관점, 생각, 철학, 가치관으로 현상이나 사회,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나의 관점과 가치관이 기준이 될 때, 평화롭고 수평적인 소통은 불가능하다. 오직 상대방을 먼저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상대방의 관점과 가치관을 수용하고자 할 때, 어떤 문제의 실마리들을 풀어가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사원문주소: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2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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