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그녀에게 가서 고백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나는 보던 책을 덮고 전화를 걸었다.
"누나. 지금 어디예요? 할 말이 있는데, 제가 그 쪽으로 갈게요"
"어 그래? 나 지금 언니가 일하는 학원에 있는데"
집에서 그녀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오 분 남짓. 수만 가지 단어, 문장, 미사여구가 머리 속을 맴돌았고, 나는 어느새 건물 앞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며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밟아 올랐다.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3층 출입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환한 미소로 반기며 들어오라고 했다. 언니는 잠깐 근처에 물건을 사러 갔다면서.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났는지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시험 공부는 잘 하고 있지? 공부할 거 많다면서 어떤 일로?"
"아뇨. 그냥 공부하다가 집중도 안 되고 바람도 쐴 겸, 누나랑 얘기도 할 겸 온 거예요"
우리들은 십여분 동안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녁은 무얼 먹었는지에 대한 일상적인 얘기를 했다. 할 말을 더 이상 마음 속에 담아둘 수 없던 나는 거기에 온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좋은 누나와 동생으로 만났지만, 이제는 다른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평소 자연스러웠던 그녀의 미소가 상당히 부자연스러워진 것을 보며 당황하고 있음을 직감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음... 성우야. 갑작스런 고백에 누나가 조금 당황스러운데, 일단 이렇게 먼저 말해줘서 고맙고, 나에게도 시간을 좀 줄 수 있을까?"
2002년 한일월드컵은 6월에 끝났지만, 대한민국의 4강 신화 열기가 여전했던 10월 12일의 밤에 나는 쓸쓸하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고백하러 가기 전에 끝내지 못했던 '자원봉사론'이라는 과목 시험 공부를 마치고, 막 잠자리에 들기 전 예쁜 편지지 하나를 꺼냈다. 그 밤이 지나가기 전에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진심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내 마음을 담았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 같았다. 오전에는 파트 타임으로 일을 하고, 오후에 대학교를 다니는 그녀의 일상을 알고 있었다. '9시까지 일터로 출근하니 30분 전에 집 앞에 가서 기다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녀의 집 앞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침에 잠깐 전해줄 게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주택가 처마 밑에서 이슬비를 피하며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영화로 그런 장면들을 볼 때는 낭만적이며 설레였지만, 현실은 초조함과 조급함뿐이었다. 내 마지막 진심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누나. 잘 잤어요? 어제 밤에 누나 얘기 듣고 저도 이런 저런 생각 많이 했어요. 제 마음을 담은 편지인데요. 시간 날 때 꼭 읽어주세요."
"그랬구나. 알겠어요. 내가 잘 읽어볼게. 오늘 하루도 잘 보내고~"
그녀의 뒷모습이 점이 되고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있을 시험 준비를 마치고, 전주로 갈 준비를 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 마음과 생각은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려줄 것인지에만 꽂혀 있었다.
아침부터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늦은 오후 그녀에게서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 날이 아니면 그녀를 놓치고 평생 후회할 것 같았던 내 예감은 적중했다.
"성우야. 네 진심 너무 잘 봤어, 너무 고맙고, 음... 우리 한 번 잘 해보자. "
올 해로 20년째 우리는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아내 정원을 통해 나는 사랑을 받고 주는 법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두 아이도 생겼다. 항상 나를 믿고 지지해준 아내가 있었기에 청소년활동가 라는 일을 지금까지 할 수 있었다.
매번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어쩌면 나의 단점까지도 보듬어주며 자신을 조금 더 내어준 정원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일이 있다면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해봐라. 특히 그것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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